암관련 글 모음/암을 극복한 사람들

[스크랩] 말기 대장암 환자 박사님되다-김명원씨

홍바라기의 love lettet 2012. 11. 19. 11:26
[암 이길 수 있다]대장암 진단 김명원씨
암은 네거티브(negative) 게임? 실제로 암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도 하고 꿈꿔왔던 목표를 단념케 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암은 심신의 건강을 훼손시키기 때문에 인생의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김명원(48`여`대전시 도룡동) 씨도 1995년에 암 진단(대장암 3기)을 받고 깊은 상실을 경험했다. 부와 명예의 배경이었던 서울을 떠나야했고 출세의 상징이었던 직장을 잃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 김 씨에게 암은 기회였다. 암 투병은 ‘비움’에서 ‘채움’으로 향하는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소망해왔던 시인의 꿈을 이루는 계기가 된 것.

◆외국여행 앞두고 대장암 진단
1994년 무렵부터 김 씨는 소화불량, 구토에 시달렸다. 제약회사에서 약사로 근무하던 김 씨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 정도로 여기고 이런 저런 약으로 속을 달랬다. 95년 설 무렵엔 왼쪽 옆구리와 아랫배에 지속적인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출산의 고통보다 심한 통증 때문에 남편 몰래 진통제를 먹으며 새벽을 맞아야 했다.

고통과 인내의 팽팽한 균형이 깨질 무렵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은 시댁 식구들과 호주로 휴가를 떠나기로 한날. 속은 불편했지만 모처럼 가족과 떠나는 여행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있었다. 진료실에서 의사는 다짜고짜 수술을 해야 하니 입원하라고 했다. 의사가 휘갈겨 쓴 진료기록부에 ‘colon cancer’(대장암)라는 글씨가 보였다.

◆비장까지 전이 재발공포 떨어
95년 2월 그녀의 입에 에테르 마취덮개가 씌워졌다. 암 종양은 대장 대부분을 잠식해버렸고 비장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10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대장 대부분이 잘렸고 전이된 암 종양들도 모두 절제되었다. 눈에 띄는 암세포들은 모두 없앴지만 원발암(대장)과 전이암의 상태가 심각해서 언제 재발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수술의 공포 속에서 겨우 빠져나오니 항암 주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항암제의 가장 큰 공포는 가공할 만한 부작용. 김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끝 모를 설사, 어지럼증, 두통이 이어졌다. 식사를 전혀 할 수 없어 링거로 며칠씩 연명해야 했다. 손끝, 발끝이 타 들어가 시커멓게 변해 한여름 골목길을 나설 때도 장갑, 모자를 쓰고 다녔다. 무려 13개월의 항암 치료가 계속 되었다. 한때 우울증까지 겹쳐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깨끗한 공기 찾아 고향으로
항암치료가 끝나자 김 씨가 제일 먼저 한일은 깨끗한 공기를 찾아 나선 일. 처음에 서울 외곽지로 옮겼다가 아예 고향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전으로의 이사는 고향으로의 회귀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공간에서의 탈출의미가 더 강했다.

고향은 그녀의 심신을 안정시켰고 무엇보다 집 주변의 깨끗한 자연환경은 그녀의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과거 무절제했던 생활에 대한 반성으로 식생활도 완전히 바꾸었다. 식사습관을 철저히 규칙화, 규격화했다. 매끼 방울토마토 낱알까지 헤아려가며 계량화했다. 브로컬리, 상추, 부추, 양배추, 쑥갓을 신선한 것으로 매끼 충분히 먹었다.

의사는 운동량과 면역력은 정비례한다며 운동을 강조했다. “차 열쇠를 버려라, 1시간 거리는 무조건 걷는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자신과 약속이었다. 운동은 기분을 전환시켜 주고 상념을 없애주었다. 운동을 하는 순간만큼은 암 환자라는 수식어에서 자유로웠다. 아침마다 아파트 뒷산 산책로를 1시간씩 걸었다. 운동 시작 몇 달 만에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변비가 말끔히 해결됐다.

◆문학박사, 교수, 시인으로 새 출발
철저한 식이요법, 꾸준한 운동, 깨끗한 환경 속에서의 요양은 김 씨를 삶의 활력으로 충만케 해주었다. 복부에 흉한 수술 자국도 점차 아물어 갔고, 항암제에 위축되었던 그녀의 영혼도 생기를 얻었다.

‘죽음의 추억’에서 놓여나자 김 씨는 ‘작은 반란’을 모의했다. 어릴 적 그토록 소망했던 문학을 다시 시작한 것. 문학에 목말랐던 그의 감성이 쉴 새 없이 시어(詩語)를 뿜어냈다. 항암주사를 맞는 중에도 동네 백일장에 나갔고 대전시`충남도 주최 백일장에 나가 두 번이나 장원에 올랐다. 임헌영 선생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내친김에 성균관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올해 국문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지금 김 씨는 대전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과 ‘반디자연학교’라는 환경생태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한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제 이름 앞에 약사라는 호칭 대신에 이젠 문학박사, 시인, 교수, 시민운동가 등이 명함을 대신하고 있어요. 전 하나를 버렸을 뿐인데 그 자리에 몇 곱절 소중한 가치들이 채워졌어요. 모두 암이 가져다준 선물이죠.”


사진설명: 지난 2월 성균관대학 대학원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있는 김명원씨.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작성일: 2006년 04월 19일
 
출처 : 암과 싸우는 사람들
글쓴이 : 날카로운 은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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