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65

[시 100선] 26.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던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 ※ 심훈(1901 ~1936)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주로 쓴 작가로 ..

[시 100선] 25. 청포도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1939년 8월)에 발표된 이육사의 대표작입니다. 육사의 서정성과 바램을 볼 수 있으며 일상의 평화와 평온이 한껏 느껴지는 시이면서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는 육사의 詩중에 하나입니다. 칠월의 여름 한 낯에 흰 돛단배를 타고 청포를 입고 고향으로 찾아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일상을 한번도 가지지 못한 시인의 꿈이지..

[시 100선] 24. 절정 / 이육사

절정 / 이육사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은 「문장」(1940년 1월호)에 발표된 이육사 시인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절정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에 많이 쓰이며 어떤 상태나 상황이 극단적으로 좋아지는 정점에 올랐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단어로는 정점, 고점등이 생각나며 의미는 비슷하지만 방향성이 완전히 반대의 단어로는 바닥을 치다. 나락, 극한 등이 있을것 같습니다 시인이자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군인이 이제 일제에 쫒겨 쫒겨 간 곳, 저 ..

[시 100선] 23. 교목(喬木) / 이육사

교목(喬木) /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교목]은 1940년 7월 「인문평론」(1940년 7월)에 발표된 이육사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쉽게 교목이라하면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로 생각할수 있지만 여기서 교목이란 작은 키의 관목에 대비하는 큰나무로 교목의 사전적 의미는 '줄기가 곧고 굵으며 높이 자란 나무'라는 뜻으로 흔히 곧게 뻗은 큰 아름드리 나무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교목은 때론 마을의 상징이 될 것이고 어느 높은집의 동량이 되거나 대들보가 되고 또 교목은 춘하추..

[시 100선] 22. 황혼 / 이육사

황혼 / 이육사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다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의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 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 도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오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틴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진 긴 세 냇..

[시 100선] 21. 광야 / 이육사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詩人 이육사는 일제시대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손꼽힌다. 과연 저항시는 무엇일까? 말그대로 해석하자면 저항이란 어떤 모순되고 불합리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저항의 마음은 당연한 서정성이며 그러기에 저항시라고 특정하는 詩 ..

[시 100선] 20.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늘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 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詩의가슴을 살프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싶다 ※ 1931년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이 29세 되는 해에 지은 시로 저는 군데더기 하나 없는 시어로 밝은 서정과 따뜻한 마음이 잘 나타나있는 시입니다. 고향 시골집 흙담 아래에 앉아서, 파아란 하늘과 햇살 받으며 ,실개천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 듣는 한 낮을 눈감고 떠올려보세요. 햇살이 우리들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서 나도 모르는 사이 눈니 감기고 사르르 잠들 것 같습니다. 를 영랑의 마지막 시로 소개하고 다음에 소개할 시인은 누구의 ..

[시 100선] 19. 수풀 아래 작은 샘 /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 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샘 두레박이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얽혀져 잠긴 구슬 손결이 웬 별나라 휘흔들어 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녘 그대 종종걸음 훤 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 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런 향그런 이야기 날을 새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 밤 내 혼자 나려가 볼거나 나려가 볼거나 ※ 중앙문화사에서 발간한 영랑시선(1949)에 수록된 시입니다. 1949년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이며 또한 시인이 운명을 달리하기 1년전으로 은 그의 마지막 시집이 됩니다. 을 감상하면 영..

[시 100선] 18. 북 / 김영랑

북 / 김영랑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 - 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 김영랑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때 나는 이름만으로 그가 여류작가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시를 읽다보면 남성적인 힘이 느껴집니다. 영랑은 대부분 시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고 이번에 소개하는 이란 시도 가제이며..

[시 100선] 17. 독(毒)을 차고 /김영랑

독(毒)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1939년 에 발표한 시입니다. 처음 라는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