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65

지장보살

지장보살 / 서창범 먼 옛날 옛적, 인도의 바라문 가문에 살았던 마음씨 고운 18세 소녀 방종과 믿음없이 살다 간 어머니 구원하려 부처님 찾아 먼 길을 떠나네 부모의 업장소멸 기원하며 고단히 가는 길 먹을 것 달라면 음식 내어 주고 입을 것 달라면 걸친 옷 벗어 주네 길 떠난 바라문 소녀 마지막 걸친 실오라기 하나마저도 보시하고 지옥문 닫고 마지막으로 나오겠다며 산채로 묻혀서 기도하네 ​먼 옛날 옛적, 이 땅의 가녀린 소녀들도 못난 애미 애비 살리려 지옥으로 끌려갔다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비 내리는 불국사

비 내리는 불국사 / 서창범 소슬소슬 비 내리는 불국사 사람들 발걸음마저 그치고 천년을 마주 보며 서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쓸쓸히 비를 맞고 있다 비를 뚫고 온 청춘남녀 한 쌍 두 손 꼭 잡고 탑 앞에 서서 사랑맹세 아름다워라 아뿔싸! 저 탑은 그 옛날 아사녀와 아사달의 가슴 아픈 전설이 서린 탑, 자신의 그림자조차 감춰버린 탑인데, 님들아 그 탑에서 사랑맹세하지 마라 불국사 주차장에는 내리던 비 그치고 조금 전 만났던 젊은 연인들도 집으로 돌아갈 시외버스를 다정히 기다리네 비 내리는 날, 그렇게 불국사에는 사람들이 혼자와서 물끄러미 탑을 보기도 하고 젊은 연인들이 탑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기도 하고 오늘도 그때처럼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계속하네

시를 잊은 시인(詩人)

시를 잊은 시인(詩人) / 서창범 한 줄의 시도 적지 못하는 날이 몇 해 동안 시인을 괴롭혔다 시를 잊은 시인에게 시를 언제 잊었냐는 질문대신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물으니 시인은 시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시를 잃은 시인에게 시와 어디서 헤어졌냐는 질문대신 작은 손을 흔들어 보이니 시인은 시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시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수줍음을 잊어버렸고 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시를 쓰지 못한 시인은 시를 찾아온다며 먼 길을 떠났고 아직도 시인은 여행 중이라는 소문이 시장 후미진 곳 모퉁이에서 들려온다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 서창범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열석자굳은맹세 녹두꽃떨어지면울고간다던님은 내몸내서아국운수보전하고 남쪽을열어새세상만들자던님은 기험하다기험하다아국운수기험하다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다짐하는열석자약속 내몸에한울님모시고조화가자리잡으니 영세토록잊지않고만사를알아가서 춘삼월호시절에태평가불러보세 侍 天 主 造 化 定 侍 天 主 造 化 定 永 世 不 忘 萬 事 知 世 不 忘 萬 事 知

아버지

아버지 / 서창범 1월의 겨울 밤 어두운 골목을 뚫고 길가에 섰다 태어나곤 처음으로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렸다 여느 때 보다 세차게 부는 바람이 뺨을 때리고 살을 에고 있었지만 느끼진 못했다 흐릿한 눈발로 은하수의 별들을 찾아 헤어가며 은행나무를 벗 삼아 기대였다 몽롱해져 가는 정신이 밤 중 고요를 깨고 들려오는 엠블런스의 괴음에 강타되었다 들것에 실려 가물가물 숨쉬며 마지막 집을 찾는 아버지의 육신과 눈물조차 말라버린 어머니의 한에 어느 듯 가슴은 찢어졌다 위태위태 그의 손을 부여잡고 재 되어 스러지는 체온을 감지했다 무언(無言)의 연속에서 서로의 눈을 주고받았다 이 밤 할 말은 많은데 무어 그리 바빴던지 재촉 심한 사자의 등쌀에 나의 손을 맥없이 뿌리쳤다 구슬픈 여인의 울음소리에 시계 소리가 잠들고 눈..

작별

작별 / 서창범 헤어짐을 알려야 할 땐 하동마을 강가에서 마냥 그대와 밤을 지샐렵니다 머리 위 긴 강줄기 하나를 찾게 되면 그 속의 별자리를 더듬읍시다 어둠이 조금씩 깔려오면 조그마한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핍시다 크지는 않지만 밤새 타오를 모닥불을 만듭시다 싸늘함이 우리들에게 다가오면 나의 품으로 그댈 감쌀겁니다 밤새껏 얘기를 나눕시다 수 천 번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예전의 그 말들 새벽이 오고 다시 아침이 밝아오면 재와 연기만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남겨 놓고 떠납시다 마지막 인사로는 안녕이란 말 한마디에 족합니다 덜컹거리는 열차 칸에서 가슴 한 구석에 파고드는 그대 생각을 허탈한 한 조각 웃음으로 셈하렵니다 만나는 순간부터 이별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에 또 미소를 보내야만 합니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 서창범 비가 내린다 더위에 타올랐던 아스팔트의 비명이 사라지고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비가 내린다 구슬픈 청춘을 닮은 빗소리는 풀벌레소리마저 숨죽이게 하고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비가 내린다 우산 밖은 빗줄기로 가득 찼지만 내가 걸어가는 머리 위로는 한방울도 떨어지지 않고 나는 아직도 빗속을 걸어가고 있다 또 비가 내린다 처량한 비가 내린다

지기지우(知己知友)

지기지우(知己知友) / 서창범 1. 친구 한 날 한시에 태어나지 않으면서도 너와 난 친구가 되었다 한 가지에서 나진 않았지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어느 날 너와 난 친구가 되었다 서로 주고받는 말속에서 어느 누구가 먼저 친구 되어 주기를 부탁하지 않았지만 너와 난 친구가 되었다 2. 벗 내가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나의 등을 두드리며 살며시 술잔을 건네주던 넌 나의 벗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나와 같이 살아줄 넌 나의 벗이었다 다툼이 있어도 어느 누가 잘못했다는 말 할 필요 없는 다음날 다시 웃을 수 있는 넌 나의 벗이었다 3. 동무 네가 아무리 못나고 찢어지는 가난뱅이라도 넌 내 생명보다 소중한 내 동무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내가 북망산천으로 향할 때 넌 날 위해 밤새워 술 ..

독수리바위에서

독수리바위에서 / 서창범 저 높은 바위에 새 한 마리 산다고 불려진 이름, 독수리바위 나 어릴 적 바위를 지키던 그 새는 떠나고 없지만 수풍한서(水風寒暑) 견뎌 낸 바위는 오늘도 말없이 오가는 이들에게 쉴 자리 내어주네 바위가 나에게 묻는다 자신을 떠나 간 새는 잘 살고 있는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대답 대신 살포시 미소만 짓다가 애써 도심의 시가지를 바라본다 저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가 보이고 가끔 산책하는 공원이 보이고 봉암갯벌에서 새때 한무리 남천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보이는 대학은 일요일의 한가함에 고요하고 기숙사 앞 연못에는 파란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내려와 앉아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스무살 이후 난 한번도 새가 궁금한 적이 없었다 바위를 지키던 새의 부재(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