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65

[시 100선] 16.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시인(1903.1.6~1950.9.29)은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윤식, 영랑은 아호로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할 때부터 사용하였습니다. 1919년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때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서는 만세..

혼돈의 죽음

혼돈의 죽음 / 서창범 지구별에 사는 어떤 시인이 이제 시詩를 쓰지 않는다고 하여 찾아가 왜냐고 물으니 더는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소만으로 도道를 전하고 몇 되지 않는 글자로도 애틋한 마음을 실어 보냈든 시절은 전설의 나라 이제 점점 길어가는 말과 글만큼 사람들의 미움과 오해는 더 깊어가네 이는 필시 그 옛날 숙과 홀이 혼돈에게 보답코자 뚫은 칠규七竅때문 혼돈은 보고, 듣고, 말하고, 숨 쉴 수 있게 되었지만 오호통재라 ! 칠일지나 혼돈은 그만 죽어버리고 일곱구멍만 남은 혼돈의 나라 백성들은 이제 모두 소요한 세상에서 살아갈 운명에 빠졌다네 생각해보니 혼돈의 죽음은 똥구멍을 만들지 주지 않았음이랴 나는 다시 시인을 찾아가 시인의 시로 혼돈의 똥구멍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볼까.

[시 100선] 15. 내 늙은 아내 / 서정주

내 늙은 아내 / 서정주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 여태껏 다른 시인의 시는 시간을 갖고 올렸지만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이렇게 빨리 소개를 마치는 것은 어쩜 그의 시를 소개하는 그리고 좋아한다는 부담감도 나에게 작용하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작품으로써 시만 생각했을 때는 그의 작품에는 군데더기가 없다고 할 만큼 훌륭한 작품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서정주 시인의 마지막 소개 詩로 [내 늙은 아내」를 선정한 이유는 곱곰히 그의 시를 찾아보다 그가 생에서 보여준 진심과 ..

[시 100선] 14. 가을에 / 서정주

가을에 /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低俗)에 항거(抗拒)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잎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국화(菊花)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白露)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즘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楊貴妃)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開闢)은 또 한번 뒷문(門)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

[시 100선] 13. 동천(冬天) / 서정주

동천(冬天) /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1976년 5월 137호에 발표된 시로 그의 서정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서정주 시인의 서정성은 적극적인 표현을 자재하고 한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살며시 그리웠다고 고백하는 듯 시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김소월의 서정성은 "나 아주 많이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면 서정수 시인의 서정성은 말 한번 건네지를 모한 짝사랑과도 같은 느낌입니다.

[시 100선] 12. 견우(牽牛)의 노래 / 서 정주

견우(牽牛)의 노래 / 서 정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 이 시는 1948년 시집 「귀촉도」에 수록된 시로 김소월의 접동새에 견줄만한 서정주 시인의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 시이다. 서정주의 시를 감상하며 그의 일제에 대..

[시 100선] 11. 자화상 / 서정주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

[시 100선] 10. 별헤는 밤 / 윤동주

별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 100선] 9.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두운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어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 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섬뜻하기도 하고 예지력으로 미래를 투시한 듯한 시인은 마치 자신의 미래와 죽음을 미리 보고 예지한 듯한 싯구가 마음이 아픔니다. 마치 몇 년 후에 있을 자신의 죽음을 예상이나 한 듯 25살의 청년은 자기 방에 누워 자신을 따라온 자신의 백골을 보며 대화를 하고 어..

[시 100선] 8. 십자가 / 윤동주

십자가 / 윤동주 쫒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에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 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1941년은 윤동주 시인이 25세 되는 해로 그해 12월에는 연희전문을 졸업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주옥같은 시는 바로 1941년을 기점으로 하여 쓰여졌던 시들입니다. 1941년 5월 31일에 지은 십자가는 종교인의 엄숙함이 시인의 자아에 보이며 또한 말하지 못하는 청춘의 고뇌도 가득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