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시인(1915~2000)은 전북 고창 출생으로 호는 미당(未堂), 1936년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의 재능에 비해 그의 친일행적과 현대사에서 독재자에 대한 찬양으로 인해 항상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안타까운 시인의 운명을 살아갔다.
저도 서정주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것에 많은 생각을 했지만 시의 소개와 함께 그의 친일 및 독재찬양 행적을 함께 이야기함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분명 그는 잘못된 선택과 길에서 앞장서고 홍위병 역활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창씨개명하고 친일 활동을 하는 오점을 남겼으며 이로 인해 광복 후 반민특위에 소환되었을 때 일제 치하가 수 백 년 더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우리 민족 대다수의 당시 생각이었다는 변명을 남김도 모자라서 이승만 찬양과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노골적 찬양으로 생을 오욕으로 물들였습니다.
한번은 실수이고 오판이라고 할지라도 혜안의 글을 쓰던 시인의 선택은 일평생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의 시는 진심의 시가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자화상>은 1937년 그의 나이 23세에 쓴 시로,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1941)에 맨 앞에 실린 시입니다. 어쩜 이 시는 앞으로 그의 삶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미리 예견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서정주가 일제에 동조하고 찬양하기 전 윤동주시인도 서정주 시인의 시를 사랑했것만, 그는 변절의 시인이 되어 영원한 죄의 낙인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공교롭게도 윤동주 시인 역시 23세인 나이에 <자화상>이란 시를 썼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간 두 젊은이가 같은 나이에서 바라본 자화상은 이미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아픔이 공전하는 시대의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더욱 아픈 시익도 합니다. 서정주 시인의 서정시는 그 어느 시인의 시 못지 않게 아름답지만 그의 재능은 어쩜 그를 불행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의 시의 재능만큼, 안타깝지만 행동에 대한 비난도 함께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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