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임파선전이 말기암 식이요법 으로 완치◆
한쪽 가슴이 없어도 그녀의 가슴 속은 사랑으로 넘치고 있다 늦은 발견으로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은 김선옥씨,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는다며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모두 삶의 몸짓이었다. 남편과 아들의 지극한 간병으로 유방암을 딛고 일어선 그녀의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뜨금거리는 통증 때문에 잠이 깼다. 뭔가 손에 잡히는데 ‥‥
1998년 봄이었다. 늦은밤 통증 때문에 잠이 깼다 오른쪽 가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뜨끔거려 뒤척거리다가 불을 켰다. 뜨끔거리는 부위를 이러저리 만져보니 땅콩 반쪽이나 될까 작은 물질이 손에 잡혔다.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우리 나이쯤 되면 유방암이 잘 생긴다고들 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다.
옆에서 곤히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이상해, 이상해, 너무 아프고 뭐가 잡혀."
"어 ‥‥ ?"
눈을 부비고 일어난 남편은 내 가슴을 만져보고는 정신을 차린 듯 내일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성화를 댔다. 밤에는 통증도 더 심하고 걱정도 더 깊어지는 법, 한번 깬 잠이 쉬 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보건소로 향했다.
간밤 걱정보다는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싸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별일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보건소로 갔다. 보건소 의사는 X-레이를 찍고 통보 해주겠다면서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하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2주일을 보냈다. 그 사이 별 통증은 없었기 때문에 '그래 별 거 아니었어' 마음이 놓였다. 아니나다를까 2주 뒤 받은 검사 결과 양쪽 유방 모두 정상이라는 소견이었다.
너무 기뻤다. 가슴 졸이던 고민이 풀리고 보니 걸어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가슴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더 심하고 더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종합병원으로 찾아난 나는 조직검사를 받자는 의사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서 있을 힘조차 없어졌다. 며칠 뒤 조직 검사 결과 유방암이었다. 유방암, 그래 그 예사롭지 않은 통증의 주범은 바로 암이었다.
의사의 말은 한가지, 빠른 시일 내에 유방 절제수술을 하자는 것이었다. 절제 수술,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방암이란 엄청난 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절망과 함께 거리에서 나만 외톨이가 된 듯한 슬픔을 느꼈다. '나는 왜 살았는가'라는 비애감에 미친 사람처럼 길
거리를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마침 쌍둥이 형제 중 큰아들의 상견례가 있는 날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은 왜 이제야 오냐며 핀잔이었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좋은날 내 얘기를 해서 모두의 기분을 더 이상 망칠 수가 없어 결국 약속 장소로 따라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태연하려고 애써도 자꾸 서러운 생각 때문에 표정은 어두웠을 것이 당연하였지만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며 그래도 최선을 다하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참고 있던 설움에 눈물이 복받쳤다. 아들의 결혼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안고 싶었던 손주 한번 못보고 이제 내 인생이 끝나는구나, 남편에게 오늘 병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남편은 미안하다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런 남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곧 '수술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며 초기에 발견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며 위로를 했다.
가슴적출수술, 항암 치료 ‥‥ 끝도 없는 암과의 싸움
이제 뒤를 볼 여유가 없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서 더 나은 병원을 알아보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의 O병원으로 가서 재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역시 유방암 몇기냐는 남편의 물음에 담당의는 초기인 것 같다며 수술을 해봐야 알겠다고 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암 환자들 때문에 며칠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입원을 할 수 있었고 그 사이 투병하던 암 환자들 사이에서 죽음의 공포도 느꼈다. 너무나 두려웠지만 옆에 남편과 쌍둥이 아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따뜻한 가족애 속에 나는 점점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조직검사를 하면서 건드린 환부는 오히려 점점 커져 이제는 계란 크기만큼이나 크게 만져졌다. 그 사이 통증은 겨드랑이까지 번져 가끔 통증에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이를 확 깨물어야 했다. 드디어 수술 날짜가 다가왔다.
7월 22일 세시간의 걸친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때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괜찮다고 해? 암 몇 기라고 해?'
온 몸을 쥐어짜 물었지만 너무 궁금해 물었지만 남편과 아들은 그저 별거 아니라고 이제 암 초기라고 끝말을 흐렸다. 그래도 그 한마디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암환자였으니까 ‥‥
며칠 뒤 환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담당의가 찾아왔다. 욱신욱신 아팠지만 그래도 암 때문에 생기는 통증보다는 참을만하였다. 그래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생겼으니 그 아픔도 사그러들었을까. 하지만 붕대를 풀고 내 상처를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절망, 그래 이게 절망이야.
한쪽 가슴이 갈비뼈만 남기고 깊어 패여져 흉직한 것이 암 환자면서, 그래도 이제 나는 여자도 아니구나 서러움이 복받쳤다.
참고 있던 울음이 쏟아지고 상실감에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내 눈물은 의사의 한마디에 이내 사그러들었다.
"김선옥님 이 우리 병원에서 가장 큰 수술을 하셨습니다."
"예?"
위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격을 주자고 한 말도 아니었지만 그건 사실이었고 내 정신도 함께 번쩍 들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 내 삶의 끈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일어나기 위한 좌절을 겪어야만 한다. 남편에게 물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떤거냐고.
어렵게 입을 뗀 남편은 이미 가슴은 물론 임파선까지 전이가 된 암4기여서 가슴과 겨드랑이까지 긁어냈다는 말과 함께 담당의가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도 함께 하더란다. 남편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지만 함께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고 하였다. 그런 남편이 너무나 고마워 또 눈물을 훔쳤다.
수술 뒤 아직도 멈추지 않는 암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였고 약도 잘 챙겨먹었다. 독한 항암제 주사를 맞으니 여느 암환자들처럼 머리가 한 웅큼씩 빠져 가발을 쓰게 되었다.
가발을 쓰면서 듬성듬성 성기어 가는 머리카락만큼이나 한 웅큼씩 삶의 의지가 빠져나갔다.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이대로 그냥 죽었으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내가 쓰던 물건도 버릴 건 버려야지 정리도 하였다. 어느 날 화장대 앞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남편이 주저앉았다. 이러면 아무 것도 안된다고 조용히 되뇌이는 모습이 나보다 더 안쓰러웠지만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나지만 집안에 여자가 없으니 살림도 말이 아니었다. 밥이며 빨래, 청소까지 다 내 손이 가야 하는데 이렇게 주저앉고 보니 참담하였다. 그때 큰아들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예비 며느리의 도움이 너무도 컸다. 직장 마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시집에 와서 온갖 일을 다 거들고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지금도 업어주고 싶을만큼 감사하다.
새삼 지금 이야기지만 그때 가발을 쓰고라도 결혼식을 올린 것은 죽기 전에 며느리 하나라도 봐야 한다는 생각, 며느리에게 남편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머리가 다 빠져 가발을 쓴 시어머니의 자리 ,30분도 안되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눈물의 결혼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곤혹스럽던 식이요법 하지만 남편의 사랑으로 버텼다
남편은 이런 와중에도 암에 관한 정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전라도고 경상도고 간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몇백 만원어치 상황버섯을 사들고 들어와 정성껏 달였지만 그 무엇도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으로부터 박양호 실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강의를 한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두 시간에 걸친 강의를 듣고 그 동안 느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건 바로 믿음이었고 확신이었다
"실장님 제 아내를 살려주세요. 제발..."
"예, 수술을 하신 건 잘하신 겁니다. 우선 암을 제거하였으니 이제 지금 남아있는 암과 앞으로의 전이를 막는 것이 우선입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50%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대수술을 받고도 10%의 가능성밖에 남아있지 않던 아내가 살 수도 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러워 남편은 눈물을 훔쳤다고 하였다. 먼 곳에 희미하게 비추던 빛 하나가 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길로 남편은 식단을 받아왔다. 녹즙과 건강보조식품, 식사를 제대로 지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이번만은 남편의 눈빛이 하도 결연하여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죽을 사람은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죽는 것이지 아무리 먹는 음식으로 나을 병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지 못해 먹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소원 못 들어줄까 싶었다.
잡곡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으면서 이것도 항암제 못지 않게 고역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루에 열다섯 번 식전, 식간, 식후 먹다보니 항상 배가 불러서 나중에 숟가락 들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몸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된 병원 치료가 입맛을 떨어뜨린게 원인이었지만 먹어야 산다는 내 삶의 의지조차 꺾인 상태였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아침에 아침잠이 많아 30분은 실랑이를 해야 겨우 일어나던 사람이 새벽 5시면 눈을 떴다. 내 녹즙과 식사를 준비하고 출근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뒤척뒤척 좀더 잠을 일찍 깨는 날이면 다시 잠이 들까봐 뜬눈으로 두 시간을 보내고 녹즙을 준비하는 날도 있었다. 그게 너무나 고마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고마워서 못견딜 때에도 나는 말하였다.
"너무 애쓰지 말아요. 죽을 사람은 죽어요. 그게 하늘이 뜻일예요."
이렇게 억지를 써도 남편은 들은 척도 안했다. 속이야 검게 다 탔겠지만 암이 어디 보통 병인가. 간병하는 사람이 모든 걸 감내하고 참아야 함은 이미 깨달았을 것을. 그 후 나는 한결같은 남편의 노력과 정성에 차차 동화되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될 일에 저리 단지 아내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리도 열정적일 수 있을까. 6개월이 지나가면서 나는 녹즙을 마실 때 기도를 하게 되었고 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여보. 당신의 정성 때문에 자꾸 살고 싶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내가 인정할게, 당신의 노력. 당신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나를 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아."
"‥‥"
우리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하였다. 꼭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약속,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 암으로 인하여 생긴 어긋난 매듭을 풀고 나니 내 병도 차도가 보였다. 희망이 생기니 먹는 일도 힘들지 않았고 하루가 다르게 몸이 달라졌다.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힘들었던 내 몸이 어느새 산책에서 등산으로 등산에서 야유회로 발전하면서 나는 다시 사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남편은 녹즙 재료를 직접 구하기 위해 나를 산 밑에 앉혀두고 중턱에서 꼭대기까지 훑고 다녔다.
채취한 약재는 정성껏 닦아 달이고 즙을 내, 내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그 힘을 받아 1년이 지난 정기 검진 결과 반드시 전이될 것이라는 담당의들의 예상과는 달리 몸 어느 곳에서도 암덩어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한달, 석달, 6개월 그리고 1년 단위로 병원을 찾아 정기검진을 받게 되었고 5년이 지난 2003년 드디어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사이 나는 할머니가 되어 손자, 손녀를 보게 되었고 작은 아들 결혼식도 잘 치루었다. 암 선고를 받은지 이제 7년, 나는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만큼 행복하다. 남편의 어머니같은 사랑을 느꼈고 자식들에게 내가 있어 행복하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이제 암을 극복한 사람이다. 결코 암 환자가 아니라 이를 이겨낸 건강한 사람이다. 아직까지 효모와 녹즙을 열심히 먹고있으며 살아있는 것에 감사한 여자이다. 모든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쪽 가슴을 잃었지만 내 마음 속에 간직한 가슴에는 뜨거운 사랑과 함께 감사함이 넘쳐나고 있다
영동 세브란스 병원
"유방암의 통합의학치료 요법"특강
세계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핑크리본 운동이 한창이다. 이 운동은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유방암을 예방, 치료하기 위하여 시작된 운동으로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핑크리본을 붙이고 다니는 여성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유방암이 여성들에게는 치명적인 병이고 발병율도 높음을 말해준다. 지난 2004년 10월 21일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유방암의 권위자 이희대 교수를 비롯하여 통합의학 치료 특강이 벌어진 가운데 박양호 실장의 천연물 특강도 이어졌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유방암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특강은 성황리에 끝났으며 또 유방암 여성들에게도 아름다울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영동 세브란스 강의 내용은 비디오 테이프로 다시 볼 수 있다.
한쪽 가슴이 없어도 그녀의 가슴 속은 사랑으로 넘치고 있다 늦은 발견으로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은 김선옥씨,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는다며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모두 삶의 몸짓이었다. 남편과 아들의 지극한 간병으로 유방암을 딛고 일어선 그녀의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뜨금거리는 통증 때문에 잠이 깼다. 뭔가 손에 잡히는데 ‥‥
1998년 봄이었다. 늦은밤 통증 때문에 잠이 깼다 오른쪽 가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뜨끔거려 뒤척거리다가 불을 켰다. 뜨끔거리는 부위를 이러저리 만져보니 땅콩 반쪽이나 될까 작은 물질이 손에 잡혔다.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우리 나이쯤 되면 유방암이 잘 생긴다고들 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다.
옆에서 곤히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이상해, 이상해, 너무 아프고 뭐가 잡혀."
"어 ‥‥ ?"
눈을 부비고 일어난 남편은 내 가슴을 만져보고는 정신을 차린 듯 내일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성화를 댔다. 밤에는 통증도 더 심하고 걱정도 더 깊어지는 법, 한번 깬 잠이 쉬 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보건소로 향했다.
간밤 걱정보다는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싸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별일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보건소로 갔다. 보건소 의사는 X-레이를 찍고 통보 해주겠다면서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하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2주일을 보냈다. 그 사이 별 통증은 없었기 때문에 '그래 별 거 아니었어' 마음이 놓였다. 아니나다를까 2주 뒤 받은 검사 결과 양쪽 유방 모두 정상이라는 소견이었다.
너무 기뻤다. 가슴 졸이던 고민이 풀리고 보니 걸어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가슴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더 심하고 더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종합병원으로 찾아난 나는 조직검사를 받자는 의사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서 있을 힘조차 없어졌다. 며칠 뒤 조직 검사 결과 유방암이었다. 유방암, 그래 그 예사롭지 않은 통증의 주범은 바로 암이었다.
의사의 말은 한가지, 빠른 시일 내에 유방 절제수술을 하자는 것이었다. 절제 수술,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방암이란 엄청난 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절망과 함께 거리에서 나만 외톨이가 된 듯한 슬픔을 느꼈다. '나는 왜 살았는가'라는 비애감에 미친 사람처럼 길
거리를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마침 쌍둥이 형제 중 큰아들의 상견례가 있는 날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은 왜 이제야 오냐며 핀잔이었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좋은날 내 얘기를 해서 모두의 기분을 더 이상 망칠 수가 없어 결국 약속 장소로 따라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태연하려고 애써도 자꾸 서러운 생각 때문에 표정은 어두웠을 것이 당연하였지만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며 그래도 최선을 다하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참고 있던 설움에 눈물이 복받쳤다. 아들의 결혼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안고 싶었던 손주 한번 못보고 이제 내 인생이 끝나는구나, 남편에게 오늘 병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남편은 미안하다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런 남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곧 '수술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며 초기에 발견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며 위로를 했다.
가슴적출수술, 항암 치료 ‥‥ 끝도 없는 암과의 싸움
이제 뒤를 볼 여유가 없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서 더 나은 병원을 알아보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의 O병원으로 가서 재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역시 유방암 몇기냐는 남편의 물음에 담당의는 초기인 것 같다며 수술을 해봐야 알겠다고 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암 환자들 때문에 며칠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입원을 할 수 있었고 그 사이 투병하던 암 환자들 사이에서 죽음의 공포도 느꼈다. 너무나 두려웠지만 옆에 남편과 쌍둥이 아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따뜻한 가족애 속에 나는 점점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조직검사를 하면서 건드린 환부는 오히려 점점 커져 이제는 계란 크기만큼이나 크게 만져졌다. 그 사이 통증은 겨드랑이까지 번져 가끔 통증에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이를 확 깨물어야 했다. 드디어 수술 날짜가 다가왔다.
7월 22일 세시간의 걸친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때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괜찮다고 해? 암 몇 기라고 해?'
온 몸을 쥐어짜 물었지만 너무 궁금해 물었지만 남편과 아들은 그저 별거 아니라고 이제 암 초기라고 끝말을 흐렸다. 그래도 그 한마디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암환자였으니까 ‥‥
며칠 뒤 환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담당의가 찾아왔다. 욱신욱신 아팠지만 그래도 암 때문에 생기는 통증보다는 참을만하였다. 그래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생겼으니 그 아픔도 사그러들었을까. 하지만 붕대를 풀고 내 상처를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절망, 그래 이게 절망이야.
한쪽 가슴이 갈비뼈만 남기고 깊어 패여져 흉직한 것이 암 환자면서, 그래도 이제 나는 여자도 아니구나 서러움이 복받쳤다.
참고 있던 울음이 쏟아지고 상실감에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내 눈물은 의사의 한마디에 이내 사그러들었다.
"김선옥님 이 우리 병원에서 가장 큰 수술을 하셨습니다."
"예?"
위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격을 주자고 한 말도 아니었지만 그건 사실이었고 내 정신도 함께 번쩍 들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 내 삶의 끈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일어나기 위한 좌절을 겪어야만 한다. 남편에게 물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떤거냐고.
어렵게 입을 뗀 남편은 이미 가슴은 물론 임파선까지 전이가 된 암4기여서 가슴과 겨드랑이까지 긁어냈다는 말과 함께 담당의가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도 함께 하더란다. 남편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지만 함께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고 하였다. 그런 남편이 너무나 고마워 또 눈물을 훔쳤다.
수술 뒤 아직도 멈추지 않는 암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였고 약도 잘 챙겨먹었다. 독한 항암제 주사를 맞으니 여느 암환자들처럼 머리가 한 웅큼씩 빠져 가발을 쓰게 되었다.
가발을 쓰면서 듬성듬성 성기어 가는 머리카락만큼이나 한 웅큼씩 삶의 의지가 빠져나갔다.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이대로 그냥 죽었으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내가 쓰던 물건도 버릴 건 버려야지 정리도 하였다. 어느 날 화장대 앞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남편이 주저앉았다. 이러면 아무 것도 안된다고 조용히 되뇌이는 모습이 나보다 더 안쓰러웠지만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나지만 집안에 여자가 없으니 살림도 말이 아니었다. 밥이며 빨래, 청소까지 다 내 손이 가야 하는데 이렇게 주저앉고 보니 참담하였다. 그때 큰아들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예비 며느리의 도움이 너무도 컸다. 직장 마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시집에 와서 온갖 일을 다 거들고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지금도 업어주고 싶을만큼 감사하다.
새삼 지금 이야기지만 그때 가발을 쓰고라도 결혼식을 올린 것은 죽기 전에 며느리 하나라도 봐야 한다는 생각, 며느리에게 남편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머리가 다 빠져 가발을 쓴 시어머니의 자리 ,30분도 안되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눈물의 결혼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곤혹스럽던 식이요법 하지만 남편의 사랑으로 버텼다
남편은 이런 와중에도 암에 관한 정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전라도고 경상도고 간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몇백 만원어치 상황버섯을 사들고 들어와 정성껏 달였지만 그 무엇도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으로부터 박양호 실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강의를 한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두 시간에 걸친 강의를 듣고 그 동안 느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건 바로 믿음이었고 확신이었다
"실장님 제 아내를 살려주세요. 제발..."
"예, 수술을 하신 건 잘하신 겁니다. 우선 암을 제거하였으니 이제 지금 남아있는 암과 앞으로의 전이를 막는 것이 우선입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50%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대수술을 받고도 10%의 가능성밖에 남아있지 않던 아내가 살 수도 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러워 남편은 눈물을 훔쳤다고 하였다. 먼 곳에 희미하게 비추던 빛 하나가 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길로 남편은 식단을 받아왔다. 녹즙과 건강보조식품, 식사를 제대로 지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이번만은 남편의 눈빛이 하도 결연하여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죽을 사람은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죽는 것이지 아무리 먹는 음식으로 나을 병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지 못해 먹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소원 못 들어줄까 싶었다.
잡곡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으면서 이것도 항암제 못지 않게 고역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루에 열다섯 번 식전, 식간, 식후 먹다보니 항상 배가 불러서 나중에 숟가락 들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몸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된 병원 치료가 입맛을 떨어뜨린게 원인이었지만 먹어야 산다는 내 삶의 의지조차 꺾인 상태였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아침에 아침잠이 많아 30분은 실랑이를 해야 겨우 일어나던 사람이 새벽 5시면 눈을 떴다. 내 녹즙과 식사를 준비하고 출근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뒤척뒤척 좀더 잠을 일찍 깨는 날이면 다시 잠이 들까봐 뜬눈으로 두 시간을 보내고 녹즙을 준비하는 날도 있었다. 그게 너무나 고마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고마워서 못견딜 때에도 나는 말하였다.
"너무 애쓰지 말아요. 죽을 사람은 죽어요. 그게 하늘이 뜻일예요."
이렇게 억지를 써도 남편은 들은 척도 안했다. 속이야 검게 다 탔겠지만 암이 어디 보통 병인가. 간병하는 사람이 모든 걸 감내하고 참아야 함은 이미 깨달았을 것을. 그 후 나는 한결같은 남편의 노력과 정성에 차차 동화되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될 일에 저리 단지 아내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리도 열정적일 수 있을까. 6개월이 지나가면서 나는 녹즙을 마실 때 기도를 하게 되었고 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여보. 당신의 정성 때문에 자꾸 살고 싶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내가 인정할게, 당신의 노력. 당신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나를 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아."
"‥‥"
우리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하였다. 꼭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약속,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 암으로 인하여 생긴 어긋난 매듭을 풀고 나니 내 병도 차도가 보였다. 희망이 생기니 먹는 일도 힘들지 않았고 하루가 다르게 몸이 달라졌다.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힘들었던 내 몸이 어느새 산책에서 등산으로 등산에서 야유회로 발전하면서 나는 다시 사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남편은 녹즙 재료를 직접 구하기 위해 나를 산 밑에 앉혀두고 중턱에서 꼭대기까지 훑고 다녔다.
채취한 약재는 정성껏 닦아 달이고 즙을 내, 내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그 힘을 받아 1년이 지난 정기 검진 결과 반드시 전이될 것이라는 담당의들의 예상과는 달리 몸 어느 곳에서도 암덩어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한달, 석달, 6개월 그리고 1년 단위로 병원을 찾아 정기검진을 받게 되었고 5년이 지난 2003년 드디어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사이 나는 할머니가 되어 손자, 손녀를 보게 되었고 작은 아들 결혼식도 잘 치루었다. 암 선고를 받은지 이제 7년, 나는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만큼 행복하다. 남편의 어머니같은 사랑을 느꼈고 자식들에게 내가 있어 행복하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이제 암을 극복한 사람이다. 결코 암 환자가 아니라 이를 이겨낸 건강한 사람이다. 아직까지 효모와 녹즙을 열심히 먹고있으며 살아있는 것에 감사한 여자이다. 모든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쪽 가슴을 잃었지만 내 마음 속에 간직한 가슴에는 뜨거운 사랑과 함께 감사함이 넘쳐나고 있다
영동 세브란스 병원
"유방암의 통합의학치료 요법"특강
세계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핑크리본 운동이 한창이다. 이 운동은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유방암을 예방, 치료하기 위하여 시작된 운동으로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핑크리본을 붙이고 다니는 여성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유방암이 여성들에게는 치명적인 병이고 발병율도 높음을 말해준다. 지난 2004년 10월 21일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유방암의 권위자 이희대 교수를 비롯하여 통합의학 치료 특강이 벌어진 가운데 박양호 실장의 천연물 특강도 이어졌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유방암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특강은 성황리에 끝났으며 또 유방암 여성들에게도 아름다울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영동 세브란스 강의 내용은 비디오 테이프로 다시 볼 수 있다.
출처 : 암과 싸우는 사람들
글쓴이 : Berser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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