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암 생의 가운데에서 만나다
4부 소아암 생의 가운데서 만나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모금방송은 과연 정상적인 프로그램인가?
Writted by 홍바라기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재난이나 이슈가 생겼을 때 TV에는 간헐적이지만 중앙방송의 메인 3사가 모금 방송을 방영한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때의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한다는 소식과 함께 연일 유명한 대학의 토목계통 석학들이 TV화면에 나와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물에 잠긴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대국민 모금방송을 하였다.
어찌 이뿐이랴. 태풍이 올라오면 태풍 피해 모금방송, 비가 많이 내려 수해나 산사태가 나도 모금방송을 하며 얼마 전에는 숭례문이 불만을 품은 시민에 의해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일어나서 대통령이 직접 성금을 모아서 숭례문을 복원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많은 국민의 성화와 질책을 산 적도 있다.
또한 연말이면 단골처럼 어김없이 나오는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방송, 그리고 자연재해가 아닌 모금 방송에 항상 빠지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다.
바로 그들은 소아암 환자들이다.
머리카락 하나없이 빡빡 깍은 민머리, 병실 한 켠 침대에 누워 링거를 꼽고 병과 외롭게 싸우는 모습, 거칠게 들려오는 숨소리, 이 모든 것이 시청자들의 뇌리에 밖혀 전화기 앞에 서서 다이얼을 누르든지 방송사로 달려간다.
오늘 우리는 한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에 봉착되어 있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분명 내가 국가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세금을 내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는 개인의 한계를 넘어선 재난과 위기에서 국가가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리라는 믿음에서 출발하였다.
소아암 아이들도 이 땅의 국민이자 주인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픈 아이들의 의료비를 국가의 복지테두리가 아닌 모금방송에 의존해야 하는 것에는 다시금 생각해봐야한다.
저출산률로 인한 지원 정책으로 많은 시도에서 아이를 낳으면 각종 혜택과 심지어 출산 장려비까지 몇 백만원씩 준다. 아이가 어려서 돌봄이 필요하다고 국가는 매달 지원을 하고 유치원 과정에다가 무상급식까지 보편적 복지의 테두리에서 해결하고 있다.
손자를 돌보는 조부모에 대한 지원, 노인 틀니, 노령 연금등 수많은 복지들이 국가의 제도권 안에 들어와있다.
하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이러한 제도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잘 알 것이다.
바로 투표권이 많은 곳에 지원이 간다는 모양새다.
30대층의 표를 의식한 보육료 지원, 60대 이상의 표를 의식한 틀니, 노령연금 지원
민주주의 사회에 돈으로 투표권을 사는 행위는 분명 올바르지 못하고 처벌 받는 행위이지만 분명 공약이라는 약속과 복지라는 사면권 아래에서 공공연하게 투표권이 거래되고 있는 현장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한 가정이 있다.
가장은 모든 가족을 보살피고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 책임이 있다.
그래서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용돈도 주고 아이 옷도 사준다. 아이들 밥도 미래를 생각해서 무상으로 제공하고 공부도 시켜준다. 손주 잘 보살핀다고 노인들 용돈도 주지만 건강한 아이가 어느 순간 암에 걸렸다면 그냥 모른체하는 형국과 작금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
물론 국가에서도 소득의 수준에 따라 하위 300%에 대한 소아암 치료비 지원 사업을 하지만 이것을 지원 받는 사람들이라도 현재의 의료비 체계 속에서는 어쩔수 없이 TV의 화면 속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런 기준에 미달하는 대부분의 가정은 고스란히 가족 구성원이 책임져야 할 몫으로 남아버렸다.
비록 이 자리에서 비판을 하지만 모금 방송이 없었다면 많은 가정의 해체가 예견되고 아픈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언론은 스토리텔링에만 관심이 있고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거론한 모습을 아작까지 보지 못했다.
모금방송의 순기능도 있지만 그로인한 역기능 역시 만만치 않는 현실이며 지금 당장 금지를 시켜도 대안은 없다. 이제 이런 문제를 언론의 순기능에서 소화하고 거론하여 국가가 나설 명분을 주어야한다.
앞 정권에서 국가인권위원들이 대거 사퇴를 하고 또 언론의 자유가 하향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터넷과 통신기기가 발달되어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문명 아래서 더이상 언론이 제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강한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할 소리 못하는 언론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아암 아이들을 돕는 많은 단체들이 있다.
이제 이 단체들이 아이들의 완치 후 사회복귀와 교육 문제에 집중하려고 하여도 당장 시급한 의료비 문제에 발목이 잡혀서 더이상 나아갈 수도 없는 입장이다.
과연 소아암 아이들을 위한 어떤 방송이 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인지 잘 생각해 봐야한다.
그리고 모금방송과 더불어 균형잡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함께 방송되기를 희망합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소아암에 대한 연구와 지원은 순수한 의사들의 아이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에서 출발하였다. 당시에만 하여도 소아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백혈병과 림프종은 의사가 손 쓸 겨를도 없이 아이들에게 초췌하고 죽음과 막닥트리게 하였다.
싯다르타 무르케지가 지은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란 책의 본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내가 본 가장 애처러운 광경 중의 하나는 걸대에 높이 걸린 약병에 약물이 똑똑 떨어져 들어가는 바늘을 팔이나 다리의 정맥에 꽂고 단단히 붕대로 고정시킨 어린아이가 보행기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들은 결합되어서, 돛대는 있지만 돛은 없이 해도에 없는 거친 바다를 홀로 하릴없이 떠다니는 작은 배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모습을 본 의사와 정치인이 결국 손을 잡고 시작하여 완성한 일이 Jimmy기금에서 출발하여 소아암 병원을 짖고 이후 암과의 전쟁을 선포한 NCI의 탄생이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자본이 들어가고 또 암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또한, 암은 아직까지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치료법만 나와 있는 상태이지만 다행이 소아암의 완치율은 해를 거듭할수록 진단기술의 발달과 함께 높아져가고 있다.
이제 선진국에서는 소아암 아이들에 대한 인식이 구호의 대상을 넘어서 완치와 어울림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지원 및 연구조사부문에서도 장기생존률에 따른 사회적 복귀와 지원에 맞추어져있다.
일본의 경우만 하여도 소아암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질병으로 사회 구성원 전체가 책임져야 할 질병으로 인식되고 합의가 이루어져서 소아암 아이들의 의료비문제가 정부차원에서 해결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소아암 아이들의 현주소를 살펴보면 아직도 소아암=구호의 대상에서 머물고 있다.
각 종 방송이나 매스컴을 통해 나오는 소아암 아이들의 모습도 초췌하고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 치료비와 힘겹게 싸워가는 가족의 모습이 전부다.
이것은 이 아픈 아이들에 대한 인식이 1970년대 즈음에 머물러 있고 소아암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아버지하면 '페스탈로치',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흑인인권운동가하면 '마틴루터 킹'박사등 어느 일과 사건에는 그것을 대표하는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지만 현재까지 소아암을 대표하는 대표자는 순수한 마음이 동한 무명의 기부자가 전부이다.
소아암 아이들은 높은 완치률로 인해 치료가 종결되면 다시 학교로 복귀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로 복귀하고 있다.
하지만 치료 중에 교육받을 권리의 침해와 학업의 공백으로 인한 대학진학문제, 암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인식으로 인해 일자리를 통한 자본의 획득과 결혼 및 사회진출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였지만 유독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가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어린 학생들의 피가 뿌려졌다. 3.1 만세운동이 그랬고 4.19 역시 비겁한 어른들이 학생들의 뒤에 숨었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픈 아이들마저 어른들의 앞에 세울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소아암은 구호의 대상을 넘어서 어울림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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