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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지우(知己知友)

지기지우(知己知友) / 서창범 1. 친구 한 날 한시에 태어나지 않으면서도 너와 난 친구가 되었다 한 가지에서 나진 않았지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어느 날 너와 난 친구가 되었다 서로 주고받는 말속에서 어느 누구가 먼저 친구 되어 주기를 부탁하지 않았지만 너와 난 친구가 되었다 2. 벗 내가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나의 등을 두드리며 살며시 술잔을 건네주던 넌 나의 벗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나와 같이 살아줄 넌 나의 벗이었다 다툼이 있어도 어느 누가 잘못했다는 말 할 필요 없는 다음날 다시 웃을 수 있는 넌 나의 벗이었다 3. 동무 네가 아무리 못나고 찢어지는 가난뱅이라도 넌 내 생명보다 소중한 내 동무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내가 북망산천으로 향할 때 넌 날 위해 밤새워 술 ..

독수리바위에서

독수리바위에서 / 서창범 저 높은 바위에 새 한 마리 산다고 불려진 이름, 독수리바위 나 어릴 적 바위를 지키던 그 새는 떠나고 없지만 수풍한서(水風寒暑) 견뎌 낸 바위는 오늘도 말없이 오가는 이들에게 쉴 자리 내어주네 바위가 나에게 묻는다 자신을 떠나 간 새는 잘 살고 있는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대답 대신 살포시 미소만 짓다가 애써 도심의 시가지를 바라본다 저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가 보이고 가끔 산책하는 공원이 보이고 봉암갯벌에서 새때 한무리 남천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보이는 대학은 일요일의 한가함에 고요하고 기숙사 앞 연못에는 파란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내려와 앉아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스무살 이후 난 한번도 새가 궁금한 적이 없었다 바위를 지키던 새의 부재(不..

가을 정병산

가을 정병산 / 서창범 정병산 오르는 길 가파른 비탈에 기대어 가쁜 숨 크게 호흡하고 시원한 물 한 모금에 잊혀지는 피곤함 도심의 아파트보다 더 가까이 하늘을 볼 수 있고 더 높게 치솟는 바람을 맞을 수 있고 작은 정자의 휴식이 기다리는 정상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정상에서 달콤한 휴식을 보내고 능선을 타고 가는 길 가덕도 앞바다를 휘감아 돌고돌아 불모산을 타고 비음산을 넘어 온 바람은 고단도 할 것 같은데 이마의 땀을 상쾌하게 스쳐지나간다 이제 가을산 고갯마루에서는 도토리, 밤, 감이 한참 익어가고 쑥부쟁이, 산국, 이름 모를 가을꽃들로 가득차 바람따라 한들거리는 억새의 춤사위와 화살나무, 붉나무, 도토리나무의 고운 빛깔과 어울려 지나가는 등산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렇게 정병산은 짙은 가을 향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