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에게
예전에 아빠의 편지에서 교통사고가 많이 날 때가 출발 5분 후와 도착 5분 전이라고 한 말 기억나지?
이제 우리의 치료도 마지막 1cycle을 남겨 놓고 있구나
긴 시간, 험난한 바다의 항해에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우리 앞에는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큰 산과 같은 파도가 있단다. 너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고…….
사랑하는 홍비야 !
감염의 위험 때문에 날것은 과일을 포함하여 먹기가 어렵고 굽고 튀긴 음식은 암에 좋지 않다고 해서 안 먹고 설탕, 흰쌀밥, 흰밀가루 역시 좋지 않다고 하니 네가 먹는 음식에서 고충이 많구나.
인간의 기본 생활이 의식주인데 너는 이 3가지 중에 가운데 있는 식에 대한 불편을 겪고 있구나.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존경하는 성직자나 고승과 같은 분들은 이 3가지 모두를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신단다
제 6의 아해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성철스님', '법정스님'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할 것입니다
아빠 아고라 청원문에 나오는 제 6의 아해들이지
김수환 추기경(1922. 5. 8 ~ 2009. 2. 16)께서는 한국의 가톨릭 성직자이며 추기경의 위치에 올라가신 분이란다. 세례명은 '스테파노'란다.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에서 갑자기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별'이라는 소설이 생각나는 구나.
'별'은 어느 목동의 사랑을 다룬 단편소설로 여기에 나오는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이름이 비슷해서인가 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여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단다.
1968년 서울 대교구장에 임명되어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였단다. 또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를 사회 교리로 주장하였으며 추기경께서는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고, 생전 시국 관련 사건이나 가난한 자의 삶을 평생 돌보며 살아가신 분이란다.
성철 스님(1912 ~ 1993. 11. 4)의 속명(스님이 되기 전 이름)은 이영주이며 해인사 백련암에서 혜일(慧日)을 은사로 모시고 수계·득도한 뒤, 10년간 금강산의 마하연사, 수덕사의 정혜선원, 천성산의 내원사, 통도사의 백련암 등에서 지내셨단다.
1940년 29세 되던 해에 동화사 금당에서 동안거 중 견성하고, 1941년부터 1963년까지 송광사, 파계사 성전암, 봉암사, 묘관음사, 문수암 천제굴 등에서 수십 회의 안거를 지냈으며 1965년 문경 김룡사(金龍寺) 하안거 때는 첫 대중법문으로, <육조단경>, <금강경>, <증도가> 및 중도이론을 설법하였단다.
이후 1966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가 주석하였고, 1967년에는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였단다.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추대식에 참여하는 대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발표하였단다.
스님은 평소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잠을 적게 잘 것, 말하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 등을 권하였으며 자신도 청빈하게 생활하며 소금기 없는 음식을 먹고 작은 암자에서 살았단다. 그리고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 계실 때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3000배를 하고 난 후 만나 주시는 것으로도 유명한 일화가 있단다
열반의 순간 "잘하그래이" 한마디 남기고 열반에 드셨단다.
법정 스님(1932.10. 8 ~ 2010. 3. 11)은 한국의 승려이자 수필등 많은 글을 남기신 분이란다
스님은 평생 <무소유> 정신을 주장하고 실천 하였으며 차(茶)를 좋아하시고 음악을 좋아하시며 성철 스님에 비해서는 대중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셨단다
스님의 속명은 박재철이며 전라남도 해남(海南)에서 태어나셨단다
1956년 통영 미래사(彌來寺)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曉峰)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은 뒤, 1959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승려 자운(慈雲)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단다.
그 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내고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단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는 한편, 1996년에는 서울 도심의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시주 받아 이듬해 길상사란 절로 만드셨단다. 말년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으며 그러던 중 폐암이 발병하여 3~4년간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를 일기로 입적하셨다
스님은 입적 전에 가지신 모든 것들을 나누어 주시고 평생 출판하신 많은 책들도 모두 글빚이라고 하시며 더 이상 출판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단다.
사랑하는 홍비야 !
우리 딸도 지금 힘들고 먹는 것 때문에 가끔 투덜이 스머프가 되지만 그래도 자기 절제를 하며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주시던 제 6의 아해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
이제 남은 1cycle을 무사히 잘 마쳐서 마지막까지 우리 가족 힘을 합쳐 이 높은 파도를 잘 타고 넘어 가자구나. 그래서 항구에 도착해서는 즐거운 나의 집 노래도 부르고 봄바람도 맘껏 쐬며 행복하게 달려보자
언제나 홍비 곁에서 아빠가 지켜주고 사랑할게.
사랑해~ 홍비
2013년 1월 25일
사랑하는 아빠가
love letter -0115 제 6의 아해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성철스님, 법정스님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할 것입니다.pdf
'독백 > 홍바라기의 love letter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꼬맹이 딸인 줄만 알았는데(love letter 117) (0) | 2013.01.27 |
---|---|
꿈사랑사이버학교 수료식(love letter 116) (0) | 2013.01.26 |
손가락이 닮았어요(love letter 114) (0) | 2013.01.24 |
미국의 백혈병·림프종 학회(LLS)에서 온 답장(love letter 113) (0) | 2013.01.23 |
독일 호지킨 연구회(GHSG)에서 온 답장(love letter 112) (0) | 2013.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