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살아가는이야기

밤의 마성

홍바라기의 love lettet 2013. 8. 19. 15:08

밤의 마성

 

광복절 연휴를 맞이하여 여름의 끝자락에서 텐트를 싣고 아이들과 무주 여행을 하였습니다.

무주에는 '구천동 33경'이 아름다운 비경으로 자랑되고 있는데 그 중 제12경인 수심대 앞 주차장에 야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12경 수심대(水心台)

      파회에서 0.4km 구간이 연계된 명소다. 옥같이 맑은 물이 굽이굽이 돌고돌아 흐른다하여 

      수회(水回)라고 부르기도 하는 수심대는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산이 마치 금강산 같다하여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신라 때 일지대사가 이곳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보고 깨우친바 있다하여 수심대라 했다고

      한다. <무주군 홈페이지>

 

오전 한차례 물놀이에 온 힘을 빼앗긴 나는 오후까지 혈기 왕성한 아이들이 또 물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혼자 야영지에 머물며 조용히 계곡의 풍경을 감상하였습니다.

계곡 사이를 힘차게 흐르는 물을 보았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그 위에서 꼿꼿이 솟아 오른 아름드리 적송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쩜, 저 척박한 절벽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토록 건강한 생명들이 수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지내 왔을까?'

'물도 흙도 풍부하지 못한 환경인데 어느 나무 한 그루도 굽은 나무가 없이 하늘로 쭉쭉 뻗은 기상은 도대체 어떤 힘일까?'

 

그러면서 며칠 전 딸 아이에게 쓴 편지 내용 중 '바위와 나무'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 위에 서서 여러 질문들이 쉴새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진정 바위와 나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일까?'

'언젠가 바위와 나무가 함께 서로를 안고 떨어져야 할 시간이 올 것인데 여기의 나무와 바위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하지만 진정 아직도 미동 없이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의 바위와 나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지켜주고 있음이 분명하겠지?

 

자연을 바라보면서 떠올랐던 생각과 질문들은 결국 지난 1여년 동안 소아암 활동을 하다 이제 갈림길에 도착하여 그냥 멍하니 서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소아암 아이들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 왔습니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Yellow heart라는 소아암 아이들을 위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나의 아들과 '미래', '꿈', '지난 1년의 시간'과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낯에는 눈에 보이는 즐거움만 쫓아다녔는데 어둠이 내리고 철교 옆에 앉아 있으니 이제 물소리가 들리고 여러 풀벌레 소리가 들리구나."

"아버지, 낯에는 몰랐는데 지금 우리가 숨 쉬는 공기도 상쾌하고 풀냄새도 싱그러워요."

"이제 공기의 촉감도 풀의 향기도 느껴져요."

 

잠시 나는 예상치 못한 아들 녀석의 대답에 당황하여 '어,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감성이 풍부했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사실 감성이 풍부해서 놀란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정답을 말하고 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았기에 당황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입가는 패배의 쓴 웃음이 아닌 진정으로 기쁜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이제 먼 곳에 물어보지 않아도 바로 옆에서 바른 답과 조언을 해 줄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고 텐트로 돌아오면서 아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동생과는 이런 이야기를 함께 해보지 못했는데 동생도 함께 산책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다음에는 동생과 함께 꼭 별똥별을 보러가요"

 

밤은 때론 어둠으로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게 가린다고 하였는데,

그래서 사람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마성만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밤은 자신의 마법을 이용하여 현재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을 숨김으로써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왔지만 소외 받았던 또 다른 존재의 중요성과 평등을 알려주는 마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그날 밤 이런 메모를 남기고 잠에 들었습니다.

 

     밤의 마성 

      빛이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습니다.
      이제까지 보이던 것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물소리가 있고, 풀벌레 소리가 있습니다.
      맑은 공기의 촉감이 있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다가옵니다.
      인생도 이와 같이 부여잡았던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다가올지 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도 분명 우리의 삶의 한 자락이건만…….

 

유리구두를 남기고 무도회장을 뛰쳐나간 신데렐라처럼 그날 밤의 기억은 날이 세어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이 마성을 부려서 나에게 진정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