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암 생의 가운데에서 만나다
3부 사랑 받는 세포는 암을 이긴다.
Writted by 홍바라기
2012년 여름은 저희 가족에게 가장 잔인한 계절이었습니다.
단란한 가정에 찾아 와서 인정하기 싫은 ‘암’이란 단어, 이것은 소위 요즘 말로 ‘멘붕’이었으며 그것도 저 자신에게 내려진 선고가 아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린 딸에 내려진 진단…….
암이라는 병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아빠이자 가장이 되어 서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처음 1~2달 동안은 미친 듯이 암 관련 서적, 인터넷 자료와 기사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잠을 언제 잤는지, 밥을 언제 먹었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암의 세계로 빠져들고 그 놈들을 막연히 무찌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신문기사에서 사랑하는 엄마에게 아이가 매일 편지를 쓰서 항암을 견뎌내고 암을 극복했다는 기사를 접했으며 저는 바로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편지를 써 건넨다는 것은 아픈 아이에게 힘과 격려를 줄 뿐 아니라, 자칫 말로 하면 잔소리가 되기 쉬운 것을 간결이 중재하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으며 투병생활로 인해 소외되기 쉬운 감성을 문학작품과 이야기들로 채우고 철학을 논하고 사회적 이슈들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면서 평소 아프지 않았으면 전혀 생각지 못할 인문학의 부분까지도 자녀에게 들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부친 발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 非徒畜也.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바라보게 되느니, 바라보면 그것을 간직하고 싶지만 단순히 간직하는 것만은 아니니라.
이 글귀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사랑스러운 또 다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존재를 다시 보면 분명 처음 본 것과는 달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을 빌어 고백하건만 사실 제가 아이에게 쓴 편지는 저 자신에게도 큰 위안과 격려와 힘이 되었으며 돌이켜보면 저는 제 아이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힘없는 제 자신에게 계속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썼던 첫 편지와 마지막 편지를 읽어보시고 오늘 누군가 소중한 사람, 지켜야 할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분 곁에 있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며 Love Letter 한 장을 써서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Love Letter 1 부끄러운 고백
사랑하는 딸에게
오늘 부산까지 병원에 갔다 온다고 많이 힘들었지.
엄마 한테서는 연락을 받았다. 좋은 결과는 아니라고......,
다음주에는 완전한 결과가 나온다고 하니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자.
그리고 아직 너한테는 말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회사의 내 자리에 앉아 있는데 괜히 눈물이 나올려고 그래서 이상하다.
아빠는 참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사랑하는 딸만 지금 보고싶고 니 생각만 하면 금방 푸른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와 비를 뿌릴 기세와 같이 두 눈이 붉어지는 구나.
내딸, OO야
사랑해…….
사랑해…….
눈물이 나와 더 못 쓰겠다.
오늘은 이만,
2012년 8월 8일
사랑하는 아빠가
Love Letter 365 사랑해, OO
사랑하는 딸에게
지난밤 소리 없이 내린 비는 땅과 나무, 풀잎을 촉촉이 적셔 놓았구나.
아침의 싱그러움과 함께 가을 풀벌레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합주처럼 풀밭에서 들려오고 출근길 하천을 따라 피어 오른 갈대도 그 소리에 맞추어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단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아름다운 아침을 알린단다.
오늘은 너도 3일간의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는 날이구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단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자기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일순간 최선을 다한 딸이 아빠는 참 자랑스럽단다.
이제부터는 '사랑하는 딸에게'로 시작하는 편지 대신에 '자랑스러운 딸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써볼까?
'설마 또 편지를…….'하며 화들짝 놀란다면 이건 아빠의 농담이란다.
그래 오늘 이 편지가 너에게 약속한 마지막 편지란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중간고사가 끝나는 기간의 편지가 365번째를 맞이하는 구나. 365번 동안의 아빠의 스토킹을 무사히 잘 이겨주어서 또 한번 감사의 인사를 너한테 해야겠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얼굴도 예쁘고 지혜로운 딸이 커서 성인이 되면 어떤 사람을 만날지 궁금하구나.
너와 사귀려면 적어도 아빠가 기록한 365번 이상은 훌쩍 뛰어 넘어야 할 것인데, 아빠가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보고 있을 것이란다.
자랑스러운 OO야!
막상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이 오면 너에게 편지로 쓸 말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어떤 내용을 이야기할까 하며 나름 고심과 고민도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지금 아빠는 지난 1년의 시간을 돌이켜본단다.
암이란 단어를 남의 일로만 생각했지 나와 내 가족에게는 절대 해당될 것이란 생각조차 못했단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네가 암에 걸렸다는 확진을 듣는 순간 아빠는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리고 애비로서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가슴이 아팠단다.
암에 관련된 서적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인터넷을 뒤져 암에 대한 정보를 섭렵하던 시간들, 아빠도 암이란 녀석을 처음 대면했기에 가족들을 엄하게 몰아 부치면서 너에게 갈등의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구나.
그토록 힘들었던 시간이지만 그 또한 지나가리란 것을 그때는 결코 몰랐단다.
사실 이제서야 고백하는데, 너에게 쓴 편지는 아빠에게도 많은 힘과 위안이 되었단다.
어쩌면 아빠는 자신에게 편지를 계속 쓰고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아빠가 좋아했던 詩와 노래도 소개를 하고, 기억의 한 켠에 묻어두었던 소중한 학창시절의 감성과 영상들도 마치 낡은 앨범을 뒤져보듯이 다시 꺼내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단다.
그냥, 딸에게 1년 동안 쭉 써오던 편지를 이제는 그만 그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는구나.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란 詩 기억나니? 예전에도 아빠가 한 번 읽어 주었는데…….
쉿! 있잖아. 엄마한테는 절대 비밀인데,
아빠가 이 詩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아빠의 첫사랑이 보내 준 편지란다.
이제는 얼굴도 떠오르지 않고 그래서 길을 걷다 우연히 지나쳐도 전혀 알아볼 수 없겠지만 이 詩만은 첫사랑에 대한 아빠의 기억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단다.
행복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열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사랑하는 OO야!
오늘 아빠의 편지는 결코 마지막 편지가 아니란다.
마지막, 끝, 졸업과 같은 단어는 또 다른 시작을 내포하고 있단다.
그렇기에 지금 편지가 네가 아팠던 기간에 쓴 편지라면 이제는 네가 건강한 생활로 돌아오고 친구들이 있는 학교로 돌아갔기에 아빠는 그동안의 편지를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것이란다.
아빠가 지난 편지에서 너의 중학교 시절 인생책에는 '이렇게 저렇게 병마를 이겨낸 OO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전설이 되었다.'라는 내용으로 기록 될 것이라고 한 말들 기억나니?
그래, OO와 아빠의 이번 에피소드도 이렇게 Happy Ending으로 기록 되었단다.
앞으로 너의 앞 날에는 건강과 행복이 가득할 것이란다.
이제 마음껏 네가 꾸는 꿈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만 하렴.
그럼 어느새 그 꿈도 현실이 되어 너의 품에 안겨져 있을 것이란다.
지금까지의 시련은 맹자(孟子)의 한 구절로 위안을 삼고 감사드리자.
天將降大任於斯人也 (천장강대임어사인야)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필선노기심지 고기근골 아기체부)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의 뜻을 지치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窮乏其身行하여 拂亂其所爲 (궁핍기신행 불란기소위)
그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是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시고 동심인성 증익기소불능)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 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그리고 이것 하나는 약속해줘.
수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난 데도 아빠는 너의 아빠가 될 것이고 너도 꼭 아빠의 딸이 되어 준다고…….
지난 시간, 너의 마음을 잘 몰라주어서 아빠가 미안합니다.
병을 이기고 아빠 품에 힘차게 안겨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시련을 잘 이겨낼 것이라고 미리 알고 정하신 그분에게 감사합니다.
사랑해, OO~
2013년 10월 2일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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