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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암중모색(2) : 천운의 연속 혹은 불운의 시작

홍바라기의 love lettet 2015. 7. 30. 11:40

“보이시죠?...저 덩어리....느낌 안 좋아요...MRI 찍읍시다”

담당의사인 신박사가 갸웃거리며 설명을 하는 동안에

후배는 굳은 얼굴로 모니터를 핸드폰으로 찍어 어디론가 전송하고 있었다.

 

“형...아무래도 뇌출혈 그 이상일 거 같애”

담배를 건네며 후배가 나지막히 말을 건네왔다.

그러고 보니 사건 이후 후배와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구나...

후배는 중소 종합병원장인데 우리 식구나 다름없이 지내는 사이다.

항상 낙관적인 후배에게 이런 말이 나온다는 건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

 

후배는 메이저 병원의 의사 동료들에게 핸드폰 전송해서 자문을 구했는데

이구동성으로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며 마음 단단히 먹으라 했다는 거다.

도대체 얼마만큼 심각하며, 또 어떻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뇌출혈로 머리에 피가 터져 밖으로 나오면 그나마 다행이고

피가 터지지 않으면 뇌속에 피가 고여 위험한 거다...라는 정도만 알고 있는데

뇌출혈 그 이상이라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언어장애? 뇌성마비? 반신불수? 식물인간?....

 

“큰 형...오늘 민기가 운이 아주 좋았잖아요...잘 될 거예요”

유독 아이를 사랑하는 막내동생이 나를 위로하며 말을 건넸다.

딴은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닌게, 어찌 보면 아이는 오늘 참 운이 좋았다.

 

첫번째는... 오늘 까딱했으면 내가 현장에 없을 뻔 했다

이틀 연속 골프를 남해에 가서 치자는 후배의 제안을 내가 만류하고

수도권 가까운 곳에서 라운딩 끝내고 집에 온 것이 운이라면 좋은 운이다.

 

두번째는... 하마터면 저녁식사를 먼 곳에서 할 뻔 했다.

함께 골프를 친 막내동생이 평택 맛집에 가자는 걸 내가 집 근처로 우겼다.

주량이 퍽이나 센 우리 골프멤버들 제대로 먹었으면 어찌 됐을 뻔 했을까.

 

세 번째는... 아이가 실내농구장에서 쓰러지길 다행이었다.

오늘 아빠 엄마는 저녁 약속이 있어 밖에 나가 식사를 하니까

농구 끝나면 뭐 좀 사먹으라고 아이에게 용돈을 미리 주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농구코치의 신속한 119 신고는 너무도 고마운 결정적 조치였다.

 

네 번째는... 해외 아닌 국내에서 아이가 쓰러진 것도 운 억세게 좋은 거다.

2주 전에 가족여행으로 미국 동부를 도는 도중 아이가 차안에서 구토를 한적이 있었다.

잠깐이 아닌 하루 종일 간헐적으로 했는데 만일 그때 지금처럼 쓰러졌다면

병원입원 문제, 병원비용 문제, 일정차질 문제, 동행여행객 문제등 끔찍했을 게다.

 

다섯 번째는... 병원, 실내농구장, 우리집, 약속식당이 모두 2~3분 거리에 있었다.

마치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 처럼 실내농구장을 꼭지점으로 해서

병원, 우리집, 약속식당이 삼각형으로 자로 잰 듯이 포진 돼 있어서

뇌출혈, 119 출동, 병원 응급실 후송, 식구 집결등이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

 

그래...녀석은 참 운이 좋으니 큰 병은 아닐거야.

별거 아닐 거야...출혈된 피가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게 분명해.

평소 체격은 말랐어도 체력 하나만큼은 또래 중에서 으뜸인 놈이었는데 뭘.

뭔가 심각한 병이었다면 전조증상이 있었을텐데 그런 거 거의 없었거든....

 

내게 최면을 걸 듯 스스로 중얼 거리며, 아내에게도 안심을 시켜줬다.

그러나 섣부른 다짐에 의한 얄팍한 확신은 오래 가질 못하고

의사의 무거운 한 마디에 이내 곤두박질 해 바닥에 내동댕이 처졌다.

 

“MRI 결과....예상대로 뇌종양입니다....6cm 크기로 뇌간에 위치합니다”


아내는 은박지 구겨지듯 소파에 무너졌고,  막내동생은 펑펑 울며  허공만 바라봤고, 

후배는  담당의사와 뭔지도 모를 의학용어와 영어를 써가며 진지하게 얘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인 후배가  있어 더없이 든든함도 잠깐이고,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진부한 표현....머리 속이 하얘진다.....정말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인 대사....이건 사실이 아냐....그 말이 절로 나왔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구태의연한 모션 ....허탈한 헛 웃음...나도 모르게 지어졌다.

 

“형...장기전이 될테니 마음 굳게 먹어요”

후배가 내 어깨를 잡고 말하는데 그 말 또한 식상한 표현 같아 실감이 안났다.

 

고개를 들어 병원 건물을 바라다 보니 예전에 봤던 그런 병원이 더 이상 아니었다.

이 앞을 숱하게 지나다니며 그저 많은 건물중 하나 정도로만 인식됐었는데

이제는 시멘트 덩어리의 건물로서가 아닌 유기체 같은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아이의 운이 좋았다고 자위했는데

천운의 연속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불운의 시작인지 .....

 

출처 : 암과 싸우는 사람들
글쓴이 : 이구아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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