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低俗)에 항거(抗拒)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잎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국화(菊花)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白露)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즘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楊貴妃)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開闢)은 또 한번 뒷문(門)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 1958년 현대문학 12월호에 실린 시로 1961년 그의 네번째 시집인 [ 신라초]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가을이 가져다주는 감성에 불혹의 나이를 넘긴 시인의 세월에 대한 생각들이 녹아 있는 시로 불교적이면서도 선시(禪詩)적이고 어쩌면 세상을 달관한 듯한 그리고도 지금이 늦지않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가 기다리고 와달라고 한 그 사람은 누굴일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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