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홍바라기의 love letter

제 8의 아해는 ‘조수미’나 ‘금난새’와 같은 음악가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할 것입니다(love letter 126)

홍바라기의 love lettet 2013. 2. 5. 10:13

사랑하는 딸에게

 

어제 아빠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서 먹을 가는 니 모습이 참 예뼜다

아빠의 졸필에도 만족하고 칭찬해주니 아빠 역시 기쁘구나

오늘도 날씨가 많이 흐린데 도시락 싸서 산에 갈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니가 자고 나서 엄마랑 지난 7개월을 회상해 보았단다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해보니 연약한 여자보다는 엄마라는 타이틀로 아빠보다 더 용감하고 완치될거란 확신과 믿음으로 생활해 왔더구나

아빠는 처음에 잘 몰라서 그래서 두려웠고 자신이나 가족 모두에게 엄격했다고 엄마에게 고백을 했단다

그리고 누구보다고 우리 딸이 가장 잘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는 것에는 의견 일치를 보았지

 

사랑하는 홍비야 !

우리 가족에게 이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은 것 같구나

 

제 8의 아해는 ‘조수미’나 ‘금난새’와 같은 음악가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할 것입니다

 

오늘은 제 8의 아해를 소개하는 날

 

소프라노 조수미(1963. 11. 22 ~ 현재)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악, 무용, 피아노, 가야금 등을 익히며 서정적 감성을 키웠단다

여기서 소개하는 글은 아빠가 조수미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내용이란다

조수미는 선화 예술학교를 거치며 서울대 음대에 성악과가 생긴 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하였으며 1년 후인 1983년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 불과 2년 만에 나폴리에서 개최된 존타 국제 콩쿠르를 석권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시칠리 엔나 국제 콩쿠르는 물론 198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란시스 비냐스 국제 콩쿠르, 남아공화국 프레토리아 국제 콩쿠르, 이태리 베로나 국제 콩쿠르 등을 석권하며 노래의 나라 이태리를 거점으로 거장으로서의 발판을 굳혀 나갔단다.
 
1986년,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역으로 이태리 트리에스테의 베르디 극장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하고, 1988년에는 조수미의 오페라 인생을 세계 정상의 무대로 이끌어 올리는 계기가 되는 큰 전환을 맞이하는데 이것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만남이었단다.
'신이 내린 목소리',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목소리'라는 카라얀의 극찬과 함께 오디션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카라얀의 급작스런 서거로 게오르그 솔티 경이 대신 지휘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오스카'역으로 출연했으며 또한 「잘츠부르크의 카라얀」이라는 비디오 녹음과 함께 조수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단다.
 
이후 그녀는 세계의 여러 유명 무대에서 세계 최상급 지휘자나 연주자 또는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지역도 유럽, 미국, 일본, 호주를 포함하여 전 세계인의 귀를 즐겁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단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예전에 강호동의 '무릎팍 도사'라는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녀의 유학 생활과 사랑, 외로움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나구나

강호동 아저씨는 아빠랑 같은 중학교 동창으로 아빠는 아는 데 강호동은 홍바라기를 모르는 사이 ㅋㅋㅋ

 

지휘자 금난새(1947. 9. 25 ~ 현재)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일찍부터 음악에 대한 남 다른 취향과 재능을 보였으며 1963년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음악에 대한 확신이 두드러졌단다

특히 지휘에 대한 집념과 꿈은 더욱 강해져서 서울예고 2학년 때, 서울 영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로 데뷔함으로써 주위 사랑들의 관심을 끌어 재능을 인정받았단다. 그 후 196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으로 진학해서 작곡과 지휘법을 공부했단다.

음대를 졸업했으나 국내에서 유능한 지휘자로 인정받기에는 아직까지 어려운 점들이 많았지만 그의 열정만큼은 식지 않고 오히려 더 불타고 있었단다.

 

1970년대는 유학이 쉽지 않았었던 시대였는데 우연히 <세계 청소년 음악 연맹>이라는 곳에 참가할 기회를 얻어 독일로 간 것이 오늘날 그의 인생 전환의 전환점이 되었단다

20대 후반이었던 금난새는 음악의 도시로 알려진 독일 베를린으로 가 베를린 음악대학을 무작정 찾아갔단다. 그 대학의 지휘과 교수인 알렌도르프와 라벤슈타인 두 교수의 연락처를 받았는데 장군 이름같은 알렌도르프는 왠지 불안했고 음악가같은 이름의 라벤슈타인 교수를 선택해 연락하자 교수는 다음날 집으로 오라고 했고 금난새는 교수에게 그동안의 음악 공부를 한 여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단다.

 

라벤슈타인은 나이가 너무 늦었다며 귀국해 유학 수속을 밟고 독일로 다시 오려면 1~2년은 걸리기 때문에 여기서 바로 공부하는게 좋겠다고 조언하면서 금난새는 바로 공부를 시작했고 유학 자금이나 기타 생활도구 등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금난새를 수업료도 받지 않고 도와준 교수에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으며 후에도 학생이나 학부모가 도움을 요청해오면 그때를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단다

 

스승의 안목과 제자의 믿음이 세계적인 지휘자를 탄생시킨 순간이구나

 

이후 금난새는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카라얀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4위로 입상하여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단다. 카라얀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한 사람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에 지휘자로서는 최고의 희망과 바램이란다 

 

여기서도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 콩쿠르 시상식 당일 3명이 지휘하던 날, 금난새는 첫 번째로 지휘하고 시간이 남아 매달 할아버지 합창단 지휘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 가서 재빨리 지휘하고 돌아와 시상식에 참여하려고 했는데 당일 파티 겸 음악회를 하는 날이어 일정이 늦어져 애를 먹기도 했단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 시상식 당일 날 조그마한 동네 할아버지 합창단을 지휘하려 갔다왔냐고 하니까 금난새는 “할아버지 합창단이나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모두 똑같은 음악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라고 말했단다

 

지휘자 금난새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홍비야 !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포근히 해주는 제 8의 아해들 어떻니?

너 역시도 우리 가족의 귀를 항상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소중한 아이란다

 

이번 주말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빠에게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한번 들려주면 좋겠다

 

홍비야 아빠가 많이 많이 사랑해~

사랑해 홍바~ 

 

 

2013년 2월 5일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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