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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0선] 17. 독(毒)을 차고 /김영랑

독(毒)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1939년 에 발표한 시입니다. 처음 라는 제..

[시 100선] 16.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시인(1903.1.6~1950.9.29)은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윤식, 영랑은 아호로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할 때부터 사용하였습니다. 1919년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때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서는 만세..

혼돈의 죽음

혼돈의 죽음 / 서창범 지구별에 사는 어떤 시인이 이제 시詩를 쓰지 않는다고 하여 찾아가 왜냐고 물으니 더는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소만으로 도道를 전하고 몇 되지 않는 글자로도 애틋한 마음을 실어 보냈든 시절은 전설의 나라 이제 점점 길어가는 말과 글만큼 사람들의 미움과 오해는 더 깊어가네 이는 필시 그 옛날 숙과 홀이 혼돈에게 보답코자 뚫은 칠규七竅때문 혼돈은 보고, 듣고, 말하고, 숨 쉴 수 있게 되었지만 오호통재라 ! 칠일지나 혼돈은 그만 죽어버리고 일곱구멍만 남은 혼돈의 나라 백성들은 이제 모두 소요한 세상에서 살아갈 운명에 빠졌다네 생각해보니 혼돈의 죽음은 똥구멍을 만들지 주지 않았음이랴 나는 다시 시인을 찾아가 시인의 시로 혼돈의 똥구멍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볼까.